이제는 무조건 예배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2022. 5. 1. 12:58ㆍ조운 담임목사님 칼럼
예배의 본질
코로나19도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어느덧 익숙해진 비대면 예배가 자꾸 교회로 향하는 걸음을 주춤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는 상황과 환경, 건강 때문이라면 비대면으로라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예배는 내 상황에 따라 편한 대로 ‘치러 버리는’ 예식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은 희생제사이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다. 1959년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가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 기간 중에 주일이 끼어 있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아이젠하워는 흐루쇼프에게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제의했다. 흐루쇼프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1시간 반만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소련 측에서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선약이 있어서 그럽니다. 당신도 귀하지만, 가장 귀한 하나님과 만나기로 선약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예배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며 핵심이다. 어떤 예배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바른 예배 생활을 하면 신앙생활의 절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에서도 성공하는 길이다.
존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자기 방식대로 예배드리는 자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해 보이고, 우리의 시도가 아무리 진심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예배가 따로 있다. 어떤 분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감동하시겠다는 확신이 드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다 걱정스럽다 싶은 예배를 드리는 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몇 달, 하루가 멀다 하고 주위에서 확진 소식이 들렸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여러 가지 일로 걱정이 산더미 같은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참, 내가 하면서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지난 2년 반 동안 마음껏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소그룹 모임은 물론이요, 주일예배조차 한동안은 비대면으로 드려야 했다.
엄격한 방역 수칙과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성도들의 이탈이 심각하다. 소위 ‘가나안(‘안 나가’를 거꾸로 한 단어) 성도’가 된 것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예배가 회복돼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위기를 예배로 극복하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모임을 제한받았던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국교로서 권력을 행사하던 영국 국교회가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자유 교회를 박해했다. 영국 국교회는 30여년 동안이나 5명 이상 모일 수 없도록 제재를 가해, 공식 예배를 드릴 수조차 없게 했다. 그때 자유교회 성도들은 신앙은 어땠을까? 이들은 더욱더 엄격해졌다.
장소를 제한받자, 이들은 주일을 더 엄격하게 지켰다. 주일이 되면 집에서 더 정확한 시간에 정직한 태도로 예배에 임했다. 30년의 박해도 그들의 예배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탄압이 극심했던 17세기에 영국은 영적 대부흥을 이뤘다. 목사에게 설교를 금지시키고 감옥에 가두자 그들은 책을 집필해 남겼다. 지금까지도 사랑받으며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상》과 같은 책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저 위대한 청교도 혁명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났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이때 제정됐다.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이주한 목적은 단 하나였다.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짓기 위해서였다. 영국을 떠나 신대륙 미국으로 향하던 배 아벨라호에서 존 윈스럽 목사는 이렇게 설교한다.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언덕 위의 도시는 마태복음 5장 14절 말씀에 기반한 꿈이자 청교도의 비전이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
이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를 꿈꾸며 ‘언덕 위의 도시’라는 비전과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 누구도 숨기지 못하는 예배 공동체. 이들은 세상에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와 나라를 꿈꿨다.
이를 보며 예배로 바로 세워진 공동체의 힘은 이처럼 한 나라를 새로 건국하기도 할 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배운다.
예배가 예배 되게
예전에 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 옥한흠 목사님께서 예배 인도자와 지휘자, 반주자, 찬양 인도자 등 예배 위원을 모아 놓고 예배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나누신 적이 있다. 옥 목사님께서는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이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를 드리니 다행이다’,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강요하면 그나마도 안 할지 모르니 천천히 얘기하는 게 좋겠다’ 이런 유한 생각으로 어떻게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 내겠는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4월 국민일보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포화 속 우크라이나 복음이 희망… 성경이 동났다’
기사를 보니 우크라이나 성서 공회에서 올해 인쇄한 성경이 2월 말에 벌써 동이 났으며, 사람들이 성경을 구하려고 애쓴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 가운데 주일과 토요일, 심지어 주중 저녁 성경공부 모임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다. 주민들은 어느 때보다 예배에 갈급해 한다고 전한다. 이들은 광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1,00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유튜브를 통해서는 4만 5,000명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우리 교회는 얼마 전 금요일 심야부흥회에 새터민 강사들을 초청했다. 그들을 통해 북한 교회가 아직도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생생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강제 수용소에 갇힌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며 세계에서 박해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에서도 아직 예배는 건재하다.
예전에 금붕어를 길렀던 적이 있다. 어항 안에서 헤엄치며 잘 놀던 금붕어가 어느 순간부터 비실비실하더니 배를 위로 한 채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얼른 대야에 맑은 물을 붓고 그 안으로 금붕어를 옮겨야 한다. 일종의 응급처치다. 그 동안 어항의 물을 새로 갈아 주고 금붕어가 회복되면 다시 어항으로 옮겨 준다. 어항에 금붕어가 필요한 만큼의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긴다.
예배도 이와 같다. 예배드리지 않는 일상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야금야금 무너져 버린다. 금붕어처럼 물 위로 둥둥 떠오르거나 누가 봐도 병든 모습이 드러나면 오히려 괜찮다.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빠졌음을 깨달아 치료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예배를 비롯한 영적인 상태는 심각한 상황을 넘어 복구 불가능한 상황이 오더라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목회자와 소그룹 리더에게는 이런 성도를 돌이켜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예배가 예배 되게 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의 선배가 엄청난 대가를 치렀으며, 그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시던 순간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찢어져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이어 주신 이 귀한 특권을 포기할 것인가? 이 순간에도 예배를 드리는 몇 시간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익숙해져 버린 비대면의 경계에서 망설이는 자들을 향해 예배자로 바로 서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자. 우리에게 주신 소임을 다하는 성도들이 불같이 일어나길 기도한다.
프로필 : 조운 목사는 부산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풀러신학교(D.Min)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사랑의교회에서 14년간 사역한 후 울산 대영교회에서 20년째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현재 전국 CAL-NET 부대표, OM 선교회와 아릴락 성경번역 선교회 이사, 복음한국 이사. 울산노회 부노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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